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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는 대한민국의 중심에 위치한 충청북도의 도청 소재지다. 또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청주는 현재와 과거가 묘하게 중첩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화려한 도시의 모습을 가진 이면에 과거부터 남겨진 유적과 문화유산이 고목의 뿌리처럼 든든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청주시 상당산성에 올라 바라본 성벽위의 모습_Photo by Kim Sunghwan(Artageo)
    청주시 상당산성에 올라 바라본 성벽위의 모습_Photo by Kim Sunghwan(Artageo)

    청주의 역사

    삼한시대 청주는 마한의 땅이었다. 청주 옥산면 소로리에서 발견된 벼 유적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됐는데, 이를 통해 청주가 아주 오래전부터 농경 생활을 하던 비옥한 땅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역사 문화적으로 청주는 조금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는데, 인근 충청남도와 전라도 지역이 역사 문화적으로 고조선과 관련이 깊은 반면 이 지역 가까이에 있는 청주는 부여와 옥저 계열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는 흥덕구 오송읍 일대에서 발견된 부장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백제시대에는 청주를 상당현이라 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신라 5소경 중 하나로 서원경이라 불렀다. 이후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비로소 ‘청주’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조선시대 후기까지 매우 중요한 지방의 요충지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듯 청주는 오래전부터 지역의 중요한 도시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인근에 있는 충주와 함께 충청도라는 지역 명칭의 어원이 되었다. 또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이 만들어진 흥덕사 유적이 청주에 남아 있어 청주는 직지의 고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1908년 충청감영을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하였고, 1946년 미군정에 의해 청주부와 청원군이 분리되었는데, 1949년에 청주부가 청주시로 개칭되었다. 1980년대에 청주는 교육도시라는 별칭을 얻었을 만큼 대학교가 많았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대한민국의 가운데 위치해 있어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실제 경부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가 모두 청주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접근이 쉽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8, 90년대에는 진학을 위한 베이비 부머 세대 학생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그리고 복대동에 조성된 공단에는 취업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유입됐는데, 이런 상황이 겹치면서 1990년대 초반 청주의 인구가 50만 명을 넘게 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청주시의 인구가 25만 명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인구가 갑자기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이후 2002년~2003년을 지나면서 청주시는 비수도권 기초자치단체 중 인구가 가장 많았던 전주시를 앞지르게 된다. 이 무렵 청주시는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외곽순환도로를 만들면서 외곽으로 도시를 크게 확장했다. 그리고 2000년대를 지나면서 청주는 다시 한 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2012년 6월 27일, 청주시와 청원군의 행정구역 통합이 결정되어 2014년 7월 1일 통합 청주시가 출범한 것이다. 이로써 청주는 명실상부하게 충청북도의 거대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청주에 남겨진 문화유산

    출퇴근 시간과 겹친 교통지옥을 뚫고 서울을 출발하느라 아침식사도 못한 채 청주 상당산성을 올랐다. 낯선 사람들과 같은 공기를 호흡하며 걷기 좋은 곳이면 우리나라 어디고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듯, 이곳 역시 상당산성을 따라 것대산과 명암 약수터로 이어지는 둘레길이 만들어져 있다. 것대산으로 이어지는 상당산성 흙길은 청주 시민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니 천천히 오래 걷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마실 장소가 되어 줄 듯하다.  상당산성은 그 원형이 잘 남아있는 조선 중·후기의 대표적인 석성이다. 임진왜란 때인 선조 29년에 수축된 이후 숙종 때 대대적인 성벽개축이 이루어졌다. 상당산 능선을 따라 산을 돌아가며 둘레 4.2km, 높이 4~5m의 성벽이 이어진다. 성벽은 위기 때마다 청주 사람들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현재 상당산성에는 공남문(남문)과 미호문(서문), 진동문(동문)과 2개의 암문, 치성 3곳과 수구 3개소가 있다. 조선군이 훈련하던 동장대는 1992년에 복원해 옛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서문동의 한적한 2차선 길가에 자리한 고추만두국집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찾은 곳은 청주에서 가장 현대적이며, 화려한 거리로 알려진 성안길이다. 거대 쇼핑몰과 수많은 상점 그리고 카페와 유흥가가 넘쳐나는 이곳에 나 홀로 과거 놀이를 하듯 우뚝 서있는 용두사지 철당간이 있다. 용두사지 철당간은 국보 제 41호로 지정된 유형 문화재다. 원래는 30단으로 높이 20m에 꼭대기에는 용머리가 있었다고 한다. 당간이란 절 앞에 세워 부처의 위신과 공덕을 나타내는 깃발을 꽂아두던 기둥을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당간은 공주 갑사의 철당간, 나주 동문 밖 석당간, 담양 읍내리 석당간 등이 있는데, 만들어진 시기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청주의 용두사지 철당간뿐이다. 용두사지 철당간은 고려 광종 13년에 조성되었고, 당시 “준풍(峻豊)148”이라는 고려 독자의 연호를 널리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의 주체성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철당간을 둘러본 후 오늘의 마지막 여정으로 찾은 곳은 향토문화유적지인 '문의문화재단지'다. 이곳은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가 공존하는 장소로 청주시내에서 대청댐 방향으로 32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찾을 수 있다. 문의문화재단지는 1980년 대청댐 건설이 계기가 되어 수몰 위기에 처한 지역 문화재를 보존하고 주민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총 4만여 평의 대지 위에 '문의 아득이 고인돌', '미원 수산리 고인돌', '내수 학평리 고인돌'이 이전되었고, 문의현의 관아 객사 건물인 지방 유형문화재 제49호 '문산관'이 이전 복원되었으며, 낭성면 관정리와 문의면 노현리, 부용면 부강리에서 민가가 이전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길덕 효자각', '김선복 충신각' 및 문의 지역에 있던 옛 비석도 이전되어 있다.

    청주 여행을 위한 최고의 숙소, 그랜드 플라자 호텔

    청주에 있는 그랜드 플라자 호텔은 중부권 유일의 특 1급 호텔이다. 지상 21층, 지하 3층, 연면적 35,400평의 대규모 호텔로 328개 객실과 2,000명 이상 동시 수용 가능한 연회장, 총 7개의 레스토랑과 Bar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최고급 시설의 피트니스 센터와 영화관(SFX), 대형 할인매장과 같은 부대시설이 건물 내에 위치해 있다.  서울 강남지역에서는 자동차로 1시간 30분 거리이며, 전국 어디서나 2시간 이내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어디든 이동이 쉽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객실은 모두 6가지 종류로 구성되었는데, 비즈니스를 위한 고객뿐 아니라 편안한 여행을 원하는 사람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는 디럭스, 수준 높은 서비스와 고객의 프라이버시 보장을 기본으로 하는 이그제큐티브, 장기 투숙객을 위한 레지던스, 현대적 감각과 동양적 단아함이 살아 숨 쉬는 스위트까지 그랜드 플라자 호텔은 328개 객실마다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향이 배어 있다. 그랜드 플라자 호텔의 격조 높은 인테리어는 호텔 엘리베이터에서부터 확인 가능하다. 직지의 본고장에 자리한 만큼 프랑스에서 직접 탁본을 떠 와서 엘리베이터를 디자인하는 정성 어린 노력까지 기울였다. 이 엘리베이터는 미쯔비시에서 생산된 마지막 엘리베이터라는 가치도 지닌다. 뿐만 아니라 최고의 시설과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컨벤션홀, 카페, 일식당, 중식당, 델리샵, 로비라운지, 스카이라운지까지 절제되고 품격 있는 인테리어로 호텔의 격을 한층 더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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