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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꿈을 안고 조선시대 수많은 선비 소망과 기대로 오가던 도시 문경. 하지만 이곳은 조선시대 과거급제를 위해 지나던 길 이전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렇다 보니 삼국시대 이전부터 수많은 전쟁이 끊이지 않던 치열한 각축장이었다. 그래서 문경은 사람들의 한과 사연이 많은 곳이다. 무엇보다 민족의 상징인 아리랑을 품은 곳으로 장원급제를 바라며 문경새재를 넘던 선비들의 온갖 기대와 한숨이 노랫가락에 전해지고 전쟁으로 처절해진 한() 많은 민초들의 애틋한 사연이 세월이 되어 굽이굽이 길을 따라 서린  곳이다하지만 이런 절절한 사연을 가졌더라도 문경의 풍경은 어느 지역 못지않게 수려하고 아름답다. 경북 팔경 중 제1경이 바로 문경의 진남교반(鎭南橋畔)이라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 진남교반은 낙동강 지류인 가은천과 조령천이 영강에 합류했다가 돌아나가는 지점인데, 여기에 문경선 철교와 구교, 신교 이렇게 3개의 교량 세워졌다. 그래서 다리 주변이라는 뜻으로 교반이라는 명칭이 생겼는데,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층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자연경관과 사람이 만들어 낸 인공의 모습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진남교반의 정상에 오르면 마고산성이라 부르는 고모산성이 있다. 고모산성은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산성으로 둘레 1,300미터, 높이 7~30미터, 폭이 15~20미터나 되는 천년 고성으로, 강 건너에 있는 고부산성과 마주 보고 있다.

    문경의 눈 쌓인 고모산성 _Photo by Kim Sunghwan(Artageo)
    문경의 눈 쌓인 고모산성 _Photo by Kim Sunghwan(Artageo)

    문경새재 이야기

    영남대로 중 험하기로 소문난 백두대간의 고갯길,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이후 500여 년간 영남과 한양을 잇는 제1의 대로였다.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추풍령과 죽령 그리고 문경새재 이렇게 세 가지 길이 있었으나 문경새재가 열나흘 길로 가장 빨랐고, 추풍령이 보름, 죽령은 열엿새 길이었다. 시간만 따진다면 문경새재를 넘는 길이 가장 빨랐으나 이 길은 나는 새도 그냥은 넘기 힘들다 할 정도로 길이 험해서 차라리 하루 이틀 길을 더 가더라도 편한 길을 택했을 법도 한데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선비들은 하나 같이 문경새재 길을 고집했다. 당시에 추풍령은 가을 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대나무처럼 미끄러진다는 이야기가 있어 과거시험을 앞둔 선비들은 고생이 되더라도 굳이 문경새재를 넘어 과거 길에 올랐던 것이다. 더구나 문경시의 이름이 '들을 문()' '경사 경()'인 만큼 이곳에 있으면 경사스러운 소식이 들려온다고 해서 큰 시험을 앞둔 선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무조건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향했다고 한다. 문경새재를 넘으려면 세 개의 관문을 지난다. 임진왜란 이후 제2관문인 '조곡관'을 가장 먼저 쌓았고, 1관문인 '주흘관'과 제3관문인 '조령관'은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 쌓았다. 1관문인 '주흘관'이 옛 모습을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으며 이곳을 지나면 문경의 관광명소 중 하나로 떠오른 'KBS 사극 촬영장'이 있다. 무려 2만여 평의 부지에 고려시대의 세트장을 만들었고, 이후 조선시대 세트장으로 리모델링을 한 곳이다.

    문경새재 아리랑 이야기

    누군가는 장원급제를 바라며 문경의 험한 고개를 넘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경사스러운 소식을 기다리며 문경의 주막에서 풍류를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모산성과 고부산성이 견고한 모습으로 마주했을 신라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사변까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큰 전란을 겪어야 했을 이 땅의 민초들은 전쟁 때마다 화를 피해 보따리를 싸야만 했고 피난길에 자식을 잃고 부모를 잃은 설움을 참아가며 이 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양반이 고상하게 부르던 시조창이 아닌 일반 민초들 사이에 불리며 지금은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아리랑은 어이없게도 그 뜻도 기원도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몇 가지 가설로 추측해 볼 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리랑이 결코 흥에 겨워 신명 나게 부르던 노래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니 분명 가슴 찢기며 한 맺혔을 그네들의 사연과 어디서 풀어보지도 못하고 억지로 마음속에 묻어버렸을 그 애틋함이 이 험한 고갯길을 넘을 때에도 아리랑으로 불리지 않았을까? 2012년 말 우리의 아리랑이 유네스코에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에 문경시에서도 최초의 아리랑을 '문경새재아리랑'으로 규정하고 국립아리랑박물관 건립을 추진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미 중국에서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우리나라의 아리랑, 한복, 씨름, 전통 혼례 등을 '중국국가무형유산'으로 등재했다. 조선족의 '농악무'는 이미 중국이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시킨 상태이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지키고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매우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우리는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을 많은 부분에서 잊고 사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이라도 아리랑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더욱 높아져야 할 것이고 그런 측면에서 문경시의 국립아리랑박물관 건립 추진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문경의 막사발 이야기

    막사발, 이름만 들어도 어떤 사발인지 짐작이 가는 투박스러운 이 그릇은 지배층이었던 양반이 아닌 일반 서민들이 소유하고 사용하던 그릇으로 막 쓰는 그릇이라 해서 이름도 막사발이다. 그런데 이 막사발이 일본에서는 이도다완(井戶茶碗)’이라 하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과거 일본의 실력자였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쳇말로 이 막사발에 환장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기가 원하는 도자기를 얻기 위해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의 도공들을 무작위로 납치했는데 이 때문에 일본의 도자기 문화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어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일본에서 우리나라 도공들이 만든 막사발은 대단한 가치를 지녀서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하사하는 가장 귀한 하사품으로 사용되었고, 심지어 다이묘의 성 하나와 막사발 하나를 바꾸기도 했으며, 막사발 하나를 바치고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우리는 밥그릇, 국그릇으로 막 쓰던 것을 가져다가 국보로 삼은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수준이 낮아 막사발의 귀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자신들은 그 가치를 인정했다며 남의 것을 국보 삼은 것에 대한 변명을 합리화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 도자기를 만든 사람들이 그 가치를 평가할 만한 수준도 안 됐을까? 막사발의 매화피(梅花皮)와 자연스러운 모양새에 일본인들은 큰 미학적 가치를 두지만, 그 가치 기준이 되는 자연스러움이 사실 우리에게는 별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우리 문화 자체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집을 지어도 일본인들은 나무를 반듯하게 깎아서 골격을 세우지만 우리나라의 건축은 구불구불한 소나무를 있는 그대로 사용해 자연미를 살린다. 건축에 있어, 이렇게 구불구불한 나무로 골격을 만드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완성된 집의 모양은 자연스러운 우리의 건축이 훨씬 아름답다. 우리의 문화 자체가 인공적인 것보다는 자연스러움과 조화를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 문화는 현대로 치면 미니멀리즘의 정수였다고 할 수 있는데 조선백자는 물론이거니와 비정형, 비대칭의 달항아리는 가장 현대적인 미술 양식으로 우리 선조는 이미 몇백 년이나 앞선 미학적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수준이 낮아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니 헛웃음이 날 뿐이다문경은 이러한 우리나라의 장인정신과 수준 높은 예술혼을 이어온 대표적인 도자기의 고장이다. 충청북도 무형문화제 제10호 사기장(민속사기제작)의 고장이자 조선시대 초기 분청사기도요지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망댕이 가마'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관이나 왕실에서 쓰는 관요(官窯)보다는 일반 서민들이 사용하던 민요(民窯)를 주로 만들던 문경에서는 아직도 기계나 가스 불을 이용하지 않고 장작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는 전통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5월이면 '문경전통찻사발축제'를 열어서 우리나라 도자예술과 차(茶) 문화를 널리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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