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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고대 삼국 중 백제는 가장 섬세하고 화려한 문화를 간직한 나라다. 비록 당나라의 힘을 빌린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된 이후 백제의 문화와 역사가 온전히 보존되지 못했지만, 석가탑과 다보탑 그리고 석굴암 등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들은 하나같이 백제 유민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을 만큼 백제인의 예술과 문화 수준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삼국 문화의 정수였던 백제는 신라의 경주와 달리 두 번의 천도를 했기 때문에 3시대(위례성 시대, 웅진 시대, 사비 시대)로 구분되는데. 이번 탐방기는 웅진 시대의 공주(2)와 사비 시대의 부여(3)를 중심으로 작성되었다 섬세하고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지만 결국 쇠망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왕국 백제, 그 아련한 땅으로 떠나보자.

    백제 문화단지에 복원된 백제시대 건축물_Photo by Kim Sunghwan(Artageo)
    백제 문화단지에 복원된 백제시대 건축물_Photo by Kim Sunghwan(Artageo)

    웅진 시대의 중심지 공주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되어 660년에 멸망할 때까지 700년 동안 존속했던 고대 왕국이다. 초기 삼국 중 하나였던 백제의 웅진 시대를 대표하는 공주시는 곳곳이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이런 백제 유적을 한눈에 확인하기 위해 가장 먼저 국립공주박물관을 찾았다무령왕릉실과 충남의 고대문화실 그리고 옥외 전시장과 특별 전시실로 이루어진 국립공주박물관은 경주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작은 규모와 아담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잊히고 사라져 간 고대왕국의 서글픔이 묻어나는 박물관, 이런 선입견을 품고 견학을 시작했지만, 백제의 정교하고 섬세한 문화에 심취하다 보니 전시물 하나하나마다 눈길을 사로잡는 놀라움에 발걸음이 더디기만 하다. ‘어찌 사람의 손으로 이렇게 정교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까?’ 사라져버린 백제 문화에 대한 감탄과 탄식이 절로 나왔다. 중국처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지만 투박한 느낌의 고구려 문화에 비해 정말 작지만 정교하고 섬세한 백제문화는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뛰어난 예술성을 자랑한다. 삼국 통일 이후 통일신라의 뛰어난 문화유산은 모두 백제인의 손길이라는 말을 이곳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다음으로 찾은 곳은 송산리 고분군으로 알려진 무령왕릉이다. 송산리 고분군의 대표 격인 무령왕릉은 삼국 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묘지석이 발견되어 무덤의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다.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무려 108 4,687점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이를 통해 백제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정수라 불리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97년 이후로는 문화재의 보존을 위해 더 이상 개방하지 않는다. 대신 모형전시관을 세워 실물과 같은 복원 본을 만들어 놓았으며, 모형전시관 내부에 다양한 학습 및 안내 시설을 설치해서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중국 남조의 벽돌무덤 형태로 지어진 무령왕릉은 중국처럼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를 두었으며, 일본의 금송을 가져다 목관을 만든 것 등을 통해 웅진 시대에 백제가 일본은 물론 중국의 남북조와도 교류가 활발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 준다세 번쩨 찾은 곳은 바로 백제의 왕성(王城)이었던 공주 공산성(公山城)이다. 공산성은 백제 웅진 시대의 도성으로, 22대 왕인 문주왕이 한산성에서 천도함으로써 성왕 6년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도성이 되었던 곳이다. 사적 제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공주 10경 중의 하나로 공주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명소이다. 웅진 천도 이후 백제가 활발한 국제 교류를 통해 해상왕국의 면모를 갖추고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데 기여한 역사의 장으로, 해발 110m 능선을 따라 총연장 2,260m에 걸쳐 축조되었으며, 원래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축조되었다고 한다. 산성 안에는 백제의 궁터와 연못, 우물터 등이 남아 있고 지금은 산책로로 애용되는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금강과 공주 시내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또한, 해가 진 후 성 건너편 둔치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마치 용이 누워있는 모습처럼 보이기 때문에 일부러 해가 진 후 이곳을 찾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한국 최초의 구석기 유적인 공주 석장리 박물관이다. 공주 석장리 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구석기시대 유적지인 공주 석장리 선사유적지에 조성된 테마공원이다. 곳곳에 수렵활동을 하는 선사인들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으며, 발굴된 집터의 규모와 형태를 그대로 복원해 막집을 세워 당시의 생활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공주 10경으로 손꼽히는 만큼 탁 트인 전망과 잔잔하게 흐르는 금강 그리고 강 건너로 보이는 야트막한 산들이 굽이굽이 병풍처럼 펼쳐진 모습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평온하고 아늑하게 다가온다. 해 질 무렵 가만히 벤치에 앉아 넉넉한 모습의 주변 풍광을 바라보자면 강변의 버드나무가 산들거리는 모습과 어디선가 실려오는 모깃불 타는 냄새로 마치 역사를 거슬러 오르는 듯 편안한 휴식이 느껴지는 곳이다.

    사비 백제의 중심지 부여

    역사 탐방의 중요한 포인트는 박물관에 다 모여있다는 말을 신뢰하며, 부여에서도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바로 국립부여박물관이었다. 이곳에는 국보 제287호이자 백제 예술의 극치로 평가되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전시되어 있다. 다른 건 몰라도 백제금동대향로는 꼼꼼히 보고 확인해야 한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사비 백제 시대 문화의 백미로 꼽히기 때문이다.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에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되었는데, 높이가 61.8cm에 몸통 최대지름 19cm 그리고 무게가 11.85kg에 달하는 동아시아 최대의 박산향로다. 한 마리의 용이 머리를 들어 입으로 향로 몸체를 물고 있는 향로받침과 연잎으로 표현된 향로 몸통 그리고 신선의 세계로 묘사된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뚜껑의 정상에는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온 듯한 한 마리의 봉황이 여의주를 문 채 보주 위에 앉아있으며, 중첩된 산악으로 묘사된 뚜껑은 74곳의 봉우리에 다섯 명의 악사와 17명의 신선 그리고 42마리의 짐승을 비롯해 6종류의 식물과 20군데의 바위, 산 중턱을 가르며 난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그리고 입체적으로 돌출되어 낙하하는 폭포 등이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 이 향로는 왕실사찰의 의례용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불교와 도교의 복합적인 요소에 백제의 사상을 압축해서 표현한 백제 문화의 정수일뿐만 아니라 백제인의 뛰어난 금속 공예 수준과 주조기술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립부여박물관을 나와서 곧바로 정림사지 박물관으로 향했다. 정림사지 박물관은 정림사지관과 백제불교문화관으로 나뉘어 있는데, 정림사지관은 정림사지로 가는 길이라는 주제로 정림사의 의의와 가치를 역사적, 미술사적, 건축학적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고지도에 나타난 정림사의 위치와 백제 사비가 불교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소개하고 있다. 백제불교문화관은 백제의 불교 수용의 배경과 상황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불교 공인의 두 주역인 침류왕과 마라난타의 만남이라는 주제의 영상을 통해 불교 전래를 설명한다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되고 완숙한 아름다움으로 잘 알려진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정림사지 박물관 바로 옆에 있으며, 국보 제9호로 지정된 높이 8.3m의 석탑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 시대의 석탑이며, 목조탑을 재해석하여 재료를 석재로 바꾸고 탑의 구조를 변용해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한 한국 석탑의 시원으로 불린다.

    백제를 느낄 수 있는  백제 문화 유적

    백제 문화 유적 중 첫 번째로 소개할 곳은 사비 시대의 중심이었던 부소산성이다. 부소산성은 538년 백제의 성왕이 사비로 천도한 후부터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백제의 도읍이었던 곳으로, 당시에는 사비성 또는 소부리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부소산성의 정문인 사비문을 지나 조금 걸어 올라가면 백제 말 삼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삼충사가 있으며, 나라의 태평성대를 염원했던 영일대에 세운 누각 영일루가 있다. 또한, 백제 때의 움집을 발굴 복원한 수혈 병영지, 이령 만리창이라 불린 군창지, 사자루, 반월루, 궁녀사 등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또한 부소산성 숲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숲길에 뽑힐 정도로 잘 알려졌으며 숲길 전체의 길이는 약 3km 내외로 산책하기 딱 좋은 곳이다다음은 백제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과 삼천 궁녀의 전설이 남아있는 낙화암을 소개한다. '삼국유사'의 백제고기(백제고기)에 의하면 백제말에 나당 연합군의 군사가 쳐들어오자, 수많은 궁녀들이 슬피 울면서 흉악한 적군에게 굴욕을 당하는 것보다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 하여 대왕포 물가 높은 바위 위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사비하 깊은 물에 몸을 던졌다 하여 이 바위를 타사암이라고 불렀다 한다. 뒷날에 와서 궁녀, 즉 여자를 꽃에 비유하고 이를 미화하여 붙인 이름이 바로 낙화암이라고 한다. 바위 위에는 백화정이라는 이름의 작은 정자가 있다. 백화정에서 내려다보는 백마강은 왠지 서글프고 아련한 느낌이 든다. 꽃다운 나이에 궁녀로서의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들의 삶을 반추하듯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만이 백제의 아련한 역사를 기억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또한, 부소산의 녹음과 대비되듯 붉은색으로 바위에 쓰인 낙화암이라는 글자도 쇠락한 백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허전해진다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내려가는 길에 '고란사'라는 절이 있다. 이곳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의 마곡사의 말사(末寺)로 창건에 대해서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백제 시대에 왕들이 노닐기 위해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궁중의 내불 전이었다는 설이다.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다시 지었는데,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틈에 희귀한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의자왕이 마셨다는 고란약수의 고란샘터가 있다. 고란사를 돌아 내려가면, 백마강 선착장이 있어 유람선을 타고 백마강을 즐길 수 있으며 낙화암에 얽힌 이야기들과 노래를 들을 수 있다세 번째는 천만 송이 연꽃이 아름다운 최초의 인공정원 '궁남지'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정원인 궁남지는 궁궐의 남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마래방죽 또는 마래못 이라고도 불린다.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 공주와 백제의 무왕인 서동의 아름다운 사랑의 전설을 품고 있는 곳이다. 사비성의 이궁지로도 추정되고 있으며, 백제의 단아한 멋을 느끼게 해 주는 곳이기도 하다. '일본서기'에는 궁남지의 조경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조경의 원류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여름에는 천만 송이 연꽃 축제인 서동연꽃축제가 있으며, 포룡정의 사계와 야경은 사진 애호가들에게 잘 알려진 포인트다. 연등과 활짝 핀 연꽃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으로 인해 더운 여름날이 짜증스럽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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