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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고시대 진한 12국 중 사로국이었던 지금의 경주는 기원전 57년 신라 건국 이후부터 약 992년간 왕조를 이어온 천 년의 고도(古都)로서 당시에는 서라벌 또는 계림이라 불리던 곳이다. 도시 전체가 유적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석가탑과 다보탑으로 잘 알려진 불국사와 신비스러운 석굴암 그리고 작은 언덕이나 산이라고 여겨질 만큼 커다란 무덤들이 인상적인 도시이다.

    경주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_Photo by Kim Sunghwan(Artageo)

    신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여행에서 가장 먼저 찾아가야 할 곳은 바로 국립경주박물관이다. 이곳에는 경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거의 모든 내용이 보관전시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만 제대로 둘러보아도 신라와 경주에 대한 거의 대부분을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일정로 186 (인왕동)에 자리하고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 산하 국립 박물관으로서 주로 경주 및 경상북도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는 곳이다. 특히, 신라 시대의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는데,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박물관 중에서 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 규모가 크고 유물도 많은 곳이다. 전시는 상설전시와 특별전시로 나누어 진행하며 상설전시관은 신라역사관, 신라미술관, 월지관, 옥외전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그중 신라미술관에서는 찬란했던 신라의 불교문화를 엿볼 수 있으며, 특히 황룡사실에서는 1238년 몽골의 침략으로 전체가 소실된 황룡사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황룡사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은 후 실제 황룡사지를 찾는다면 엄청난 규모와 찬란했던 황룡사의 옛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에밀레종으로 잘 알려진 국보 제29호 성덕대왕 신종을 비롯해 LG 그룹 CI의 모티브로 익숙한 얼굴 무늬 수막새와 거대한 규모의 망새, 교과서에서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화려한 금관과 각종 불상들을 직접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주에 대한 여러 유적과 문화역사에 대한 자세하고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불국정토를 상징하는 불국사와 석굴암

    1996년 경주와 별개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따로 등재된 석굴암과 불국사는 경주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며, 과학적, 예술적, 종교적으로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내어 놓아도 빠지지 않는 인류 문화역사의 보물이다. 그중 불국사는 부처가 머무는 세상을 상징하는 곳으로 물을 건너고 구름을 지나야 정토에 들어간다는 불경의 내용에 따라 물이 흐르던 청운교와 백운교의33 계단을 건너고 자하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들어가도록 하였다. 청운교와 백운교의 33계단은 수미산과 불국정토 사이의 하늘나라로 알려진 도리천 삼십삼천을 의미하는데, 결국 도리천을 지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감을 형상화한 것이다. 대웅전 앞에는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틋한 사랑 때문에 무영탑으로 알려진 석가탑과 돌로 만든 탑 중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화려한 장식의 다보탑이 세워져 있다. 종교적인 의미로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함께 있는 영산도량(靈山道場)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문화예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 이렇게 극명한 대립을 나타내는 두 가지 양식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은 사찰과 탑을 만든 백제인과 이를 수용한 신라인의 예술적 안목과 문화적 수용성이 얼마나 넓고 대단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국사의 건축에 사용된 '그렝이 공법'은 자연석을 쌓아 올린 뒤 그 위에 인공석을 자연석에 맞도록 잘라 맞물려 올리는 방법으로 우리나라에서만 주로 발견되는 독특한 공법인데, '그렝이 공법'은 지진에도 끄떡없을 만큼의 내구성에 최대한 자연미를 이용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기술과 양식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석굴암은 세계에서 유일한 인조석굴이다. 자연적인 석굴이나 일부러 바위를 깨서 굴을 만든 뒤 그곳에 암자를 만든 것이 아니라 화강암을 이용해 돔 형태의 암자를 만들고 그 위에 자연석과 흙을 덮어 굴처럼 보이게 만든 석실암자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부에 있는 본존불은 전 세계 어느 곳의 불상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알려졌을 만큼 뛰어난 예술성과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그리고 석굴암 둘레에 부조로 만들어진 조각들 또한 하나같이 뛰어난 예술성을 지니고 있어 불국사와 더불어 통일신라 시대 우리나라의 예술적 수준과 과학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인공석실이기 때문에 석실 위에 얹힌 돌과 흙의 무게를 견디도록 설계된 건축기법과 종교적으로 신성시 여겼던 동짓날의 일출 방향에 1/1,000 미만의 오차로 정확하게 방향을 잡은 점 등 석굴암에 사용된 과학적인 방법은 전 세계의 뛰어난 건축가들조차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그중 가장 뛰어난 기술은 석굴암 내부에 생기는 습기를 제거하는 방법인데, 신라인들은 신성한 부처와 석실 내부가 습기 때문에 이끼가 끼고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석실의 돔 바닥 밑으로 샘을 흐르게 만들었다. 이를 통해 바닥 온도가 낮아지면서 실내의 습기는 바닥에 이슬로 맺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석굴암을 보수했던 일본인들은 이것을 몰라 샘을 없애버리고 콘크리트로 돔 위를 막아버렸다. 이후 우리 정부도 어쩔 수 없이 그 위에 또 시멘트를 바르게 되어 석굴암은 이제 더 이상 원형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안타까운 것은 내구성이 약해진 탓에 보존의 이유로 더 이상 석굴암 내부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애써 힘들게 석굴암까지 올라가더라도 좁은 통로 앞에서 유리창 너머로 본존불만 잠깐 보고 나와야 한다는 사실은 허망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국립경주박물관 등 다른 곳에 석굴암에 대한 복원관이나 정보관을 만들지 않고 있어 외국인은 물론이고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까지도 석굴암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하는 실정이다. 현지에서조차 교과서와 책으로 본 내용 이외의 정보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개선되어야 할 사항임에 틀림없다.

    동해를 지키는 용, 감은사지와 문무대왕릉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를 몰아낸 문무왕은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지는데, 유언에 따라 왕을 바다에 장사지낸 곳이 바로 지금의 대왕암이라고 알려져 있다. 문무대왕릉인 대왕암은 해변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자연 바위로 동서남북 사방에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수로(水路)가 만들어진 것처럼 되어 있는데, 특히 동쪽으로 나 있는 수로는 바닷물이 외부에 부딪히며 수로를 따라 들어오고 나가기 때문에 큰 파도가 쳐도 안쪽의 공간에는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된다고 한다. 그리고 안쪽의 공간 가운데는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하고 큰 돌이 놓여 있는데, 수면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어 문무왕의 유골은 이 돌 밑에 보관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감은사 역시 문무왕이 삼국통일 후 왜구의 침략을 막고 나라를 지키고자 세우기 시작한 사찰로 문무왕 이후 신문왕 2년에 완성되었는데, 죽은 후에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용이 된 부왕이 대왕암에서 드나들 수 있도록 금당 밑에는 특이한 구조로 이루어진 빈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금당 앞에는 동서로 마주 보고 서있는 장대한 크기의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는데, 높이가 13.4m로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석탑 중 가장 크며, 이후에 만들어지는 신라 삼층석탑의 원형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삼국통일 직후 금당 앞에 쌍탑으로 변모한 통일신라 최초의 가람(伽藍) 배치를 보여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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